성소수자위원회(준) 성명] 핑크워싱 넘어, 우리의 자긍심이 자랑스럽도록!

작성자
노동당
작성일
2024-05-31 20:02
조회
1589


핑크워싱 넘어, 우리의 자긍심이 자랑스럽도록!

-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을 기념하며


올해도 서울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됩니다. 2000년 처음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올해까지 스물 다섯 번 열리며 광장을 성소수자 자긍심으로 채워왔습니다.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삶이 그렇듯, 서울퀴어문화축제 역시 그동안 많은 질곡들을 거쳐왔고, 또 여러 과제들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혐오세력들의 ‘맞불집회’는 이제 연례 행사가 되었고, 서울시는 정당한 집회시위의 자유를 무시하며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개최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작년에는 혐오세력의 집회를 열어주는 방식으로, 올해는 관제 행사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개최를 막았습니다. 서울 외 타 지역들의 퀴어문화축제도 지자체 권력의 강한 방해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에도, 어쩌면 그러한 질곡들을 버텨내왔기에 더욱, 서울퀴어문화축제는 한국의 퀴어 커뮤니티에게 그 의미가 각별한 자리입니다.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긍정하지 못하는 퀴어들에게 퀴어문화축제란 숨통을 트여주는 해방구이고,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는 연대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 ‘소비자’들을 위해 ‘공급’되는 서비스 상품도, 누군가가 그 의미를 독점할 수 있는 행사도 아닙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자긍심은 퀴어 커뮤니티 모두의 자긍심이며,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의 당인 진보정당, 노동당의 자긍심이기도 합니다.

30년 남짓한 역사 동안,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은 격렬한 탄압과 혐오를 뚫고 한국 사회에 여러 의미 있는 성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서울퀴어문화축제가 큰 규모로 열릴 수 있게 된 것도, 그 자리에서 모두가 한 목소리로 성소수자 자긍심을 외치는 것도 그러한 성과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소수자 운동의 성과들을 타고, 성소수자 자긍심은 때때로 착취와 억압의 책임자들의 입에서도 나오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 억압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또는 더욱 ‘다채로운’ 방식의 착취를 위해 성소수자 자긍심을 전유하고 무기화하는 시도들을 ‘핑크워싱’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핑크워싱의 손길이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비롯한 한국 퀴어 커뮤니티의 깊숙한 곳으로 뻗치고 있는 데 심각한 우려를 표합니다.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는 초국적 제약회사인 길리어드 사이언스와 미국/영국/독일 대사관이 공식 후원단위로 참가합니다. 지방흡입 전문 병원으로 알려진 365mc 역시 후원단위로 참가한다는 사실이 공지되었다 취소되는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초국적 제약회사와 제국주의 국가의 대사관이 성소수자 자긍심을 전유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매년 문제제기가 이뤄져 왔습니다. ‘성소수자 친화적 기업 문화’를 중점적으로 본다는 서울퀴어문화축제의 후원 단위 선정 과정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 내 기독교인들의 반발’로 후원이 취소된 365mc의 사례는 자본과 권력이 말하는 ‘성소수자 자긍심’의 진정성이 어떠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초국적 제약회사들은 특허 독점과 초과이윤 추구를 위해 HIV/AIDS 치료제의 약값을 천정부지로 올렸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HIV 감염인, 퀴어 커뮤니티, 더 나아가 공공의료 시스템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립니다. 성소수자 자긍심을 이야기하며, 다른 한 쪽에서는 성소수자의 목숨값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이 말하는 성소수자 자긍심 역시 스스로의 책임 회피 수단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집단학살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학살의 또 다른 주범임에 다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가장 큰 군사원조 수혜국이며, 영국과 독일 역시 이스라엘에 무기 공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소수자 자긍심을 말하는 것으로 집단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이미지 쇄신 전략의 일환으로 ‘성소수자 친화적 국가’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소수자 친화적 국가인 이스라엘 대 성소수자 혐오적 팔레스타인 및 아랍 국가’라는 고정관념과 이분법을 확산시키며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을 ‘인권’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인 만큼,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이어지고 있는 가자 지구에도 많은 수의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삶을 살고,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다치거나 죽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퀴어와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스라엘 보이콧을 전 세계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서방의 성소수자들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성소수자들 또한 국제적 퀴어 커뮤니티의 동료들입니다. 자국 내에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는 미국, 영국, 독일의 권력자들이, 집회시위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한국 퀴어 커뮤니티의 ‘앨라이(연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집단학살 완수라는 목표 하에 “자랑스러운 동성애 혐오자”라고 스스로를 자칭하는 의원을 장관으로 임명한 이스라엘 정권이 과연 성소수자 자긍심을 입에 담을 권리가 있을까요? 우리는 권력과 자본이 말하는 ‘성소수자 자긍심’이 아닌, 국제적 퀴어 커뮤니티의 동료가 외치는 절박한 호소와 한 편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6월 1일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프라이드먼스)의 첫 번째 날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말하는 ‘성소수자 자긍심’을 긍정하는 것이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한 더 쉬운 길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모두의 해방은 연결되어 있다”는 원칙과 진리가 살아있는 한, 결국 체제 밖으로 소외된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만들어나가는 것만이 성소수자 해방을 위한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우리의 자긍심은 학살자와 착취자본의 변명거리가 아닙니다. 진정 자랑스러운 우리의 자긍심을 위하여, 함께 행동합시다!


2024.05.31.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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